[하나님의 세계] 포스팅 시리즈는 모두 순차적으로 진행되며 모든 포스팅은 선수 포스팅에 의존합니다. 차례대로 포스팅을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또한 이 포스팅(오리엔테이션)을 반드시 읽어주시고 시리즈 포스팅을 읽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과학의 정의
과학(Science)은 “지식을 얻는다”라는 “Scientia”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의되는 과학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 과학 - 자연계에 관한 일반 법칙을 체계적으로 세우기 위해 관찰 가능한 사실들을 축적하고 분류하는 일에 몰두하는 학문 분야
실습과 관찰을 통하여 자연계가 돌아가는 법칙을 세울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꼼꼼히 살펴봄으로 과학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기 전 “과학사”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류의 과학탐구
지금부터 인류의 과학사, 즉 과학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과학사는 너무나 방대한 내용이기에 모든 과학자들의 삶을 다 알아본다던지, 연도별로 있었던 일들을 다 조명해본다던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굵직한 사건들과 시대별 주요 과학자들을 알아보며 과학사를 탐구해보겠습니다.
초기 과학의 여명기 (고대 ~ B.C 600년)
고대 이집트
B.C 3000년 무렵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이미 상당히 정교한 의료 행위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의사들은 한 가지 치료법을 시도하고, 그 방법이 효과를 가지면 계속해서 활용했습니다. 만약 그 방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환자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그들은 방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 다음에는 다른 치료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이집트가 다른 고대 국가에 비해 의학이 앞선 주된 이유는 바로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를 발명했기 때문입니다.”
💡 파피루스 - 원시 형태의 종이, 파피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로 제작한다
원시 형태의 종이 발명은 정보를 전달하고 보관함에 있어서 아주 큰 유익을 가져왔습니다. 파피루스 발명 이전에는 돌이나 점토판에 정보를 기록했는데 이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며 기록물을 보관하는 것도 어렵고 이동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파피루스를 통하여 축적된 지식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며 이집트 의학은 그 시대 가장 인정받는 의학 지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진정한 과학이 태동하기 시작하다 (B.C 600년 ~ A.D 500년)
역사가들이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인류 역사상 진정한 최초 과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 수메르인, 메소포타미아인, 중국인 등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관찰 결과와 사실들을 수집했으나 주변 세계를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진 않았습니다. 즉, “과학의 정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과학자라고 불릴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은 자연계에 관한 일반 법칙들을 세워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탈레스, 아낙시만더, 아낙시메네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 사람을 인류 최초의 과학자로 간주합니다.
탈레스 (Thales, B.C 624~546)
탈레스는 하늘을 연구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통일된 주제를 찾기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탈레스가 “일시적으로 태양이 사라지는 현상”을 정확히 예측하자, 당시 세계에서 굉장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탈레스가 예측한 것은 일식이었습니다.😅)
아낙시만더 (Anaximander, B.C 610~545)
탈레스의 제자인 아낙시만더는 생명체 연구에 많은 열심을 기울였습니다. 창조주와 관계없이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려한 최초의 과학자였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었고, 인간 또한 어떤 종류의 물고기였을 것이다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후대의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고 “진화론”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아낙시메네스 (Anaximenes, B.C 585~528)
아낙시만더의 동료인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기가 점점 희박해지면 뜨거워져 불(火)이 된다고 생각했고, 공기가 많아지면 액체(水)와 고체(土)로 응축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잘못된 개념이지만 “만물은 단 하나의 물질로 구성되었다”는 아낙시메네스의 주장으로 인해 훗날 원자에 대한 개념이 태동하였습니다.
레우키포스 (Leucippus, B.C 490~?)
레우키포스는 아낙시메네스가 창안한 여러 가지 개념들을 토대로 모든 물체가 “원자”라고 불리는 아주 조그만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레우키포스는 자신의 제자인 데모크리토스와 함께 고대 원자 이론의 창시자로 불립니다.
데모크리토스 (Democritos, B.C 485~425)
데모크리토스는 자신의 스승인 레우키포스가 주장한 “원자론”을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만물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옳은 주장입니다. 다만, 데모크리토스는 원자가 어떤 모양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한 원자와 다른 원자 사이의 차이는 모양과 크기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자는 모양이 거의 같고, 크기에서도 뚜렷한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육안으로 도저히 볼 수 없을만큼 작습니다. 😅)
또한 인간 정신 상태, 사회 상태를 포함한 모든 것이 원자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고 인간의 삶의 최종 목적은 쾌락,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만물의 근원은 물질”이라는 “유물론”의 고전적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은 많은 부분에서 틀리긴 했지만, 그의 두 가지 개념은 옳았음이 증명되었습니다.
- 모든 물체는 실제로 원자로 구성되어있다.
- 그와 같은 원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은 그가 살던 시대에는 거부당했습니다. 원자의 전반적 개념이 약 2000년 전에는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과학사를 더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일들은 다분합니다.
“좋지 않은 개념을 고집하느라 훌륭한 개념을 거부한 사례들은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 명의 탁월한 그리스 과학자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그 중 중요한 과학자 3명만 추려서 알아보도록하겠습니다. 그 인물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아르키메데스, 톨레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322)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생명체”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과 식물에 관한 대규모 분류 작업”을 최초로 시도한 과학자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과학자들은 나름대로 발견한 식물과 동물에 관한 목록을 만들고 분류하려 했지만 제대로 분류하지 못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그 당시 세계에 알려진 모든 식물과 동물의 표본을 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분류체계 안에 일일이 추가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놀라운 발전을 일으킨 아리스토텔레스이지만 치명적인 오개념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연 발생”이라는 개념입니다.
💡 자연 발생 - “살아 있는 유기체들이 무생물체로부터 저절로 생성될 수 있다”
(절대로 생명체는 무생물체로부터 그냥 생겨날 수 없고 오직 생명체의 번식을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습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치명적인 오개념은 데모크리토스의 오개념보다 과학계에 더욱 심각한 해악을 끼쳤습니다.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매우 존경받는 과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오개념이 수많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가면서도 큰 존중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떠한 과학자의 성과도 단지 그 사람이 훌륭하기 때문에 무작정 지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과학적인 증거만이 그 성과를 지지하기에 과학적인 증거를 통하여 성과를 증명해야합니다.”
아르키메데스 (Archimedes, B.C 287? ~ 212)
아르키메데스는 수학 분야에 엄청난 진전을 일으켰고 수학에서 발견한 것들로 과학 분야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아르키메데스는 “유체”에 관한 연구, “지레의 원리” 등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아르키메데스의 가장 유명한 일화로, 불규칙한 형태의 물체의 부피를 구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어느 날 히에론 왕이 아르키메데스에게 금관이 순금으로 이루어져있는지 판별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이 순금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판별할 줄 알았지만, 그렇게 판별하기 위해서는 왕관의 부피를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왕관은 너무나 복잡한 형태였기에 정확한 부피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사람이 욕조에 들어가면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어떤 물건을 물에 넣을 때 차오르는 물의 양이 그 물건의 부피를 드러낸다”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욕조에서 나와 옷을 입는 것도 잊은 채 길거리로 뛰어나와 “유레카”라고 소리치며 다녔습니다😂 그렇게 이러한 원리로 왕관을 판별했을 때 왕관은 순금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했습니다.
톨레미 (Ptolemy, A.D 85?~165?)
톨레미는 천체를 연구한 사람이며 행성과 별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려고 한 최초의 과학자입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했으며 행성과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원 모양의 궤도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천동설)
이 개념 역시 오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1600년대까지 인기있는 개념이었습니다. 톨레미 역시 사람들에게 위대한 과학자로 인정받았고 톨레미의 천체 운행 체계를 반박하는 자료들은 톨레미의 명성으로 인해 무시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이론이 굉장히 인기를 누리고 인정받았던 이유는 바로 “어떤 일이 마땅히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라는 고정 관념에 딱 들어맞았기에 그렇습니다. 즉, 천동설이 인기를 끈 이유는 그 시대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행성이다”라고 생각했기에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 당시 톨레미의 천동설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부류는 “교회 출신”들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지구가 반드시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시간이 흐르며 톨레미의 이론에 대한 반박 자료가 많이 나왔음에도 교회는 지구 중심설에 위배되는 자료들을 무작정 억압하려 했습니다. 결국 수백년이 지나며 톨레미의 천동설은 반박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과학의 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입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과학자들은 크리스천인 경우가 굉장히 많았고 그들은 자신이 훌륭한 과학적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신앙” 때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일화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어떤 개념이 기존에 갖고 있는 고정 관념에 딱 들어맞는다는 이유로 그 개념을 꽉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되고, 과학은 개인적, 공동체적 신념 체계가 아니라 적절한 자료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진화론”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데 이는 증거가 풍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고정 관념에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은 채 단지 생명체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노력한다는 이유로 진화론을 좋아하고 진화론이 널리 퍼져있는 것입니다. (추후에 진화론 반박 자료들에 대해서 알아볼 것입니다.)
과학 발전이 한동안 멈추다 (A.D 500년 ~ A.D 1000년)
최초의 과학자들이 살던 시기부터 A.D 500년 경까지 과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주후 몇 세기가 지나 로마 제국이 세계의 모든 곳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과학의 진보는 급격하게 멈추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생산적인 발명품은 좋아했으나 자연계 탐구에 대해서는 극도로 싫어하고 배제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로마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활발한 무역과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과학은 한 과학자로부터 발견된 사실과 개념들이 다른 여러 과학자들에게 자유롭게 전파되고 교환되며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쇠망은 이러한 소통을 막았기에 과학 발전은 계속해서 방해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암흑시대” 가운데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있는 일들은 있었습니다.
축적된 지식과 발견들이 보존되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는 시점까지 축적된 많은 지식과 발견들은 로마의 가톨릭 수도사들에 의해 보존되었습니다. 이 수도사들과 일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성경”과 “자연”을 통하여 계시를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 계시의 두 가지 수단을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성경을 끊임없이 필사하였고 축적된 과학 지식에 관하여도 동일하게 진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과학적인 관찰 결과를 모아둔 거대한 책들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는 백과사전으로서 다음 시기에 과학이 다시 발전할 수 있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과학은 이전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기초하여 발전합니다. 그렇기에 이전에 살았던 과학자들은 과학의 진보를 위하여 연구 결과들을 공부하고 보존해야 합니다.
의학적인 진보는 계속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치료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많은 수도원에서 이전 과학자들의 성과들을 열심히 연구했는데 그 이유는 “병자를 돕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크리스천들의 중요한 사명”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고대 이집트 시절처럼 시행착오를 통한 의료 행위가 지속되며 질병 치료 기술도 꾸준히 발전되었습니다.
과학 발전이 다시 제 속도를 찾기 시작하다 (A.D 1000년 ~ A.D 1500년)
로마인들은 수많은 신들을 믿었고 각종 신들은 우주를 떠돌아 다니며 제멋대로 기분에 따라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도와준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로마의 수많은 신들은 일관성 없이 행동한다고 생각했기에 자연계 또한 역시 제멋대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굳이 자연계를 탐구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A.D 1000년 무렵, 경건한 크리스천 학자들은 “정확한 법칙에 따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자연 법칙은 불변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말인즉슨 하나님께서 운행하고 계시는 자연 법칙을 깨달으면 자연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로버트 그로스테스트 (Robert Grosseteste, A.D 1175~1253)
그로스테스트는 1200년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교였는데,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자연 법칙을 발견함으로 자연세계의 비밀들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과학 탐구의 진정한 목적은 발명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실 뒤에 숨어있는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은 모든 일이 왜 그런 식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로스테스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어떤 과학자든 관찰 결과를 내놓은 다음, 관찰된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 후에는 반드시 자신의 설명을 검증 가능한 실험들을 진행해야 한다”라고 가르쳤고 “실험 결과가 설명을 확인하고 뒷받침한다면 그 설명은 신뢰할 만한 것이고, 실험 결과가 설명과 상충된다면 그 설명은 오류가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그로스테스트의 가르침은 현대 과학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로스테스트가 바로 최초의 과학적 방법론을 설명하고 활용한 사람이기에 그로스테스트는 흔히 과학적 방법론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로저 베이컨 (Roser Bacon, A.D 1214~1294)
베이컨은 그로스테스트의 제자로서, 그와 같이 과학적 방법론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시대의 미신적인 행위들을 단절하고자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과학을 활용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베이컨은 경건한 가톨릭 신학자로서 기독교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얼마든지 과학이 사용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비행 물체를 통한 세계 여행, 잠수함, 자동차, 폭발물 등 경이로운 일들이 미래에는 과학으로 인해 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놀랍게도 그것은 후대에 과학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베이컨은 그 시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과학의 잠재력을 정확히 내다본 것입니다.
토마스 브래드워딘 (Thomas Bradwardine, A.D 1290~1349)
브래드워딘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많은 가르침에 의문을 던진 신학자였습니다. 특히, “믿음을 통한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습니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 개혁가들은 브래드워딘의 업적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브래드워딘은 교회사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개념들에서 나타나는 결함들을 발견해냈습니다. 또한 사물의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집중하였습니다. 움직임에 관한 연구에 수학을 적용하여 방정식을 만들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에 관하여 말한 부분들이 대부분 옳지 않음을 입증해냈습니다.
쿠사의 니콜라스 (Nicholas of Cusa, A.D 1401~1463)
니콜라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였으며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성품에 관심이 많았기에 이 세상에서 연구할 수 있는 가장 큰 대상인 “우주, 행성, 별”에 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니콜라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며 스스로 회전한다고 믿었습니다. 톨레미의 지구 중심설을 정면으로 반박하였습니다. 앞으로 200년간 일어날 비약적인 과학 발전에 초석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과학의 “황금기” (A.D 1500년 ~ A.D 1660년)
몇 가지 예외는 있지만, 암흑시대부터 현대까지 이르러 위대한 과학자들은 대부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과학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자연세계가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라는 개념에 기초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법칙을 바꾸시지 않는 합리적인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에 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매우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현대의 과학자들 중 그리스도인이 드물기 때문에 과학과 기독교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과학은 암흑시대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시행착오 방식에 기초한 단순한 관찰에서 진정한 과학으로 전환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제 르네상스 시절의 과학사부터 현대까지의 과학사를 살펴보면서 이를 더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 (Nicholas Copernicus, A.D 1473~1543)
로마 가톨릭 교회 성직자의 일원이었던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에 관한 톨레미의 견해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모든 행성의 중심은 태양이라고 생각하고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둔다고 생각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에 관한 연구를 마무리하고 출판하기까지 아주 오랜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책을 출판하고도 금서 목록으로 지정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의 고정 관념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과학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고정 관념으로 인해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적 관점과 주장은 이를 지지한 증거들이 많아짐에 따라 사람들에게 점점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 A.D 1514~1564)
의사인 베살리우스는 인체에 관하여 매우 정확한 설명을 하였고 의학적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인체의 장기, 근육, 골격에 관하여 매우 자세하고 정확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가 출판한 책은 인체의 내부를 속속히 묘사한 최초의 책이었습니다.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A.D 1571~1630)
케플러는 성직자가 되고 싶었으나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으로 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사 생활을 하며 천체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는 엄청난 연구 결과를 낳습니다. 케플러는 천체에 관한 연구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소망하였는데, 한 편지에서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나는 신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천문학을 연구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는지를 바라고 있다.” - 요하네스 케플러
케플러는 행성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였습니다. 케플러의 관찰 결과는 아주 자세하여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며 사용하는 궤도를 추론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케플러는 이러한 궤도를 수학적으로 표현해냈고, 이렇게 발견해낸 케플러의 수학 방정식은 “케플러의 법칙”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케플러의 법칙은 태양 중심 체계를 옹호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케플러의 법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제1법칙 :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타원궤도의 법칙)
- 제2법칙 :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같다.(면적속도 일정의 법칙)
- 제3법칙 :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장반경(궤도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조화의 법칙)
갈릴레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A.D 1564~1642)
태양 중심 체계를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는 갈릴레오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는 브래드워딘의 연구 성과를 확인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에 있는 결함들을 입증하고자 행성들의 운동을 연구하였습니다.
갈릴레오는 1609년 망원경을 발명하며 태양 중심 체계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망원경을 발명한 공로를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이 망원경을 통하여 수집한 자료들은 태양 중심 체계의 발전에 있어 매우 귀중한 가치들을 가졌습니다. 또한 갈릴레오는 행성들이 태양 빛을 반사히기에 밤하늘에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이렇게 갈릴레오는 태양 중심적 관점을 주장했으나, 로마 가톨릭은 완고하게 지구 중심적 관점을 밀고 나갔으며 갈릴레오를 이단 재판에 회부하고 갈릴레오에게 모든 저작물에서 “지구 중심적 관점”을 요구하도록 압박했습니다. 그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 순종하여 “태양 중심적 관점”을 전파하는 것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때 그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설이 내려오기도 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압박으로 인해 태양 중심적 관점을 전파하는 일은 중단헀으나 개인적으로 자료를 수집하며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갈릴레오가 죽은 후 갈릴레오가 수집한 자료들은 너무나 분명했기에 교회도 더 이상 이 사실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태양 중심 체계”는 천체에 대한 적절한 견해라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헀습니다.
블레이즈 파스칼 (Blaise Pascal, A.D 1623~1662)
파스칼은 수학 영역에서 기하학과 대수학 부분에서 여러가지 진보를 이루었고 과학 영역에서는 공기와 액체를 연구하는데 많은 노력을 들였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는 모든 것에 압력을 가한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유체 역학에서는 밀폐된 용기 속에 담겨 있는 액체의 한쪽 부분에 주어진 압력은 그 세기에는 변함 없이 같은 크기로 액체의 각 부분에 골고루 전달된다는 “파스칼의 법칙”을 입증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인 “파스칼의 도박”을 저술하였습니다. 이는 도박이라는 측면에서 한 사람의 세계관을 제시하고 그리고 파스칼은 주장하기를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도박이 바로 기독교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 파스칼의 도박 -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을 경우,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신이 존재하고 신을 믿으면, 다시 말해 옳은 선택을 했다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이다. 반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얻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신이 존재하는데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뉴턴 시대 (A.D 1660년 ~ A.D 1734년)
과학은 가히 뉴턴이 살았던 시대에 가장 큰 진보를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또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하나님에 관하여 더 많이 배우는 수단으로 과학을 연구했으며, 성경에 관해서도 많은 주석서들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법칙 세 가지를 세우며 오늘날까지 활용되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공식화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많은 업적들로 뉴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여기집니다.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A.D 1643~1727)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과학 혁명을 일으킨 책이었습니다.
세 권으로 이루어진 『프린키피아』 중 1권은 “운동의 세 가지 법칙”에 관해서 적혀있습니다. 그는 이 법칙들을 통하여 과학과 수학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학을 활용했다고는 하지만 과학과 수학의 연결고리를 견고하게 이어준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프린키피아』 2권에서는 1권에서 세운 법칙들로 고전역학을 더 구체화하였으며 파스칼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유체 운동에 관한 많은 내용들을 자세히 덧붙였습니다.
『프린키피아』 3권에서는 태양계의 구조 설명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웠습니다. 만유인력에 대한 수학 방정식을 상세 발전시켰으며 그 수학 방정식은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것으로 여기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프린키피아』 3권은 기존에 남아있던 지구 중심적 관점을 완전히 부숴버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 A.D 1627~1691)
뉴턴과 동시대를 산 인물로서, 로버트 보일은 현대 화학의 창시자입니다. 기체를 가지고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여 현재도 사용되는 법칙들을 공식화하였습니다.
그 또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자연을 활용한 설교문을 자주 작성했습니다. 그가 왕립학회에서 마지막으로 전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신 분께 영광을 돌리기를 잊지 말라” - 로버트 보일
안토니 반 레벤후크 (Antony van Leeuwenhoek, A.D 1632~1723)
뉴턴과 동시대를 산 인몰로, 레벤후크는 최초로 현미경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생명체 연구에 엄청난 혁명을 불러일으켰고 전에는 볼 수 없던 미시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테리아를 포함한 수많은 미세한 생명체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신비로 여겨지던 영역들을 과학자들이 설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도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모든 과학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했습니다. 로벤후크에게 미시 세계를 발견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가 광대함을 드러내는 큰 간증이 되었습니다.
계몽시대와 산업혁명 (A.D 1735년 ~ A.D 1819년)
이 시기는 과학의 근본적인 가정들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때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시점까지 실질적으로 진행된 모든 과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위대한 과학자들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고 또한 과학 발전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과학은 기독교에 호의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모임과 집회는 기도로 시작되었고 기독교는 모든 과학 교육의 기초였습니다.
그러나, 계몽시대부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과학계에서는 이전 과학자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자들도 실수를 하기에 과학자들의 권위에 기대는 것을 중단하고 실험과 자료에 의해 연구 성과가 비판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측면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 시기의 과학자들은 과학자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을 멈추고 모든 과학적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방향이었으나, 이렇게 과학이 과거 과학자들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하자 성경의 권위도 무시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계몽시대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이 시기와 그 이후의 수많은 과학자들이 여전히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점차 과학 저술에서 하나님에 관한 언급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그리고 과학 지식이 늘어나자 많은 발명가들이 신속하고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며 물건이 제작되는 방식들이 많이 변경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육체노동을 기계를 통하여 몇 분의 작업으로 끝낼 수 있는 수많은 기계 장치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산업 혁명 시기입니다.
카를로스 린나이우스 (Carolus Linnaeus, A.D 1707~1778)
린나이우스는 그 당시까지 연구된 모든 생명체들을 분류하고 시도한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이는 생명체의 연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분류체계이며 살아있는 모든 유기체에 대해 이 책에서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학명을 붙입니다.
린나이우스도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과학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질서정연하신 분이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 또한 치밀한 조직과 질서를 드러내는 수단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린나이우스는 자신의 책에서 인용한 전형적인 인용문이 있습니다.
“인간은 깜짝 놀랄 만큼 창조주 하나님의 무궁무진하심에 완전히 넋을 잃을 수 밖에 없다” - 카를로스 린나이우스
그는 온갖 생명체를 분류하도록 자극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했고 모든 과학 저술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 (Antoine Laurent Lavoisier, A.D 1743~1794)
라부아지에는 화학 반응을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체계적으로 화학 반응을 분석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가장 기본적인 물질은 만들어지거나 파괴될 수 없으며 다만 형태만 바뀔 뿐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인식한 과학자였습니다. (이는 “질량 보존의 법칙”입니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연소, 불이 타는 과정을 최초로 설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존 돌턴 (John Dalton, A.D 1766~1844)
돌턴은 퀘이커교도(개신교의 종파)로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돌턴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바로 “원자론”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원자에 관한 세밀한 이론들을 제안하였습니다. 몇 가지 개념은 틀리기도 했으나 대다수는 정확했기에 돌턴은 현대 원자 이론의 창시자로 여겨졌습니다.
19세기의 안식 (A.D 1820년 ~ A.D 1899년)
이 시대 또한 과학의 많은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주된 이유로는 산업혁명 이후 사람들은 발명품들을 통해 과학의 가치를 많이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과학은 많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고 이는 훌륭한 과학의 진보로 이루어졌습니다.
찰스 다윈 (Charles R. Darwin, A.D 1809~1882)
다윈은 1895년에 줄여서 『종의 기원』이라 불리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이는 과학계에서 굉장한 변혁을 일으켰습니다.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진화론”으로 알려진 이 이론은 하나님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이론입니다. 즉, 초자연적인 창조주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며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에 대한 질문을 대답하기 위한 이론이었습니다.
다윈의 저술들은 과학계를 사로잡았고, 이는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싶어했던 과학자들에게 커다란 힘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고 싶어했으며 “과학이 굳이 창조주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결국 이 이후로 대부분의 과학 문헌에서 하나님에 관한 언급을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다윈이 끼친 커다란 영향력은 “생명체 연구를 급격히 개선시킨 것입니다.” 다윈이 주장한 내용은 모두 다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렇다고 다윈이 주장한 내용들이 모두 틀린 것도 아닙니다. 그의 주장 중 많은 부분은 잘못되었으나 (어떤 주장이 맞고 틀린지는 추후에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그가 연구한 것은 생물학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을 많이 하였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유기체는 변한다는 것” 이것은 다윈이 주장한 내용들 중 옳으며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 대해 쓰기 전, 대다수 과학자들은 생명체는 시간에 상관없이 동일한 형태로 머물러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 개념은 “종의 불변성”이라 하며 이는 틀린 개념이라는 것을 그는 능숙하게 밝혀냈습니다. 유기체에 관한 정확한 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종의 불변성” 개념은 사라져야 했으며 다윈은 이러한 일을 진행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루이스 파스퇴르 (Louis Pasteur, A.D 1822~1895)
파스퇴르의 연구 결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는 박테리아와 다른 살아있는 유기체에 관하여서도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저온살균법”이라 불리는 처리과정을 개발하였고 백신에 관하여 심도깊은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현대 백신 연구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으며, 수많은 질병을 치료하기도 하였습니다.
찰스 라이엘 경 (Sir Charles Lyell, A.D 1797~1875)
이 시기에는 암석에 관한 연구도 많이 진행되어 지리학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화석에 관한 연구를 제대로 시작했습니다. 라이엘은 그 당시 널리 퍼진 지구 연대가 상당히 젊다는 개념을 깨뜨리고, 지구가 생성되기까지 수백만 년이 걸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주 과학적인 증거는 라이엘의 개념에 상충되는 방향으로 나오고 있지만, 라이엘의 연구는 현대 지질학의 이해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그의 연구는 다윈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레고르 멘델 (Gregor Mendel, A.D 1822~1884)
멘델은 오스트리아 수도사이며, 번식에 관한 연구를 상당히 오래한 경건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현대 유전학의 전반적인 부분이 멘델의 연구 결과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완두콩을 통한 만들어진 멘델의 유전법칙은 유전학의 기본 법칙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대단한 생물학자이지만 과학적 문제만큼이나 영적인 문제에 관하여 심혈을 기울였고 또한 부당하게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는 정부에 맞서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마이클 패러데이 (Michael Faraday, A.D 1791~1867)
이 시기에는 역사적으로 전기와 자기에 관한 연구에서 많은 진보를 이루었는데 패러데이는 이러한 진보의 선구자였습니다. 패러데이는 전기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며, 전기에 관한 실험을 진행하고 전기 개념들을 확립했습니다. 오늘날 전기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용어들은 패러데이가 최초로 사용했던 용어들입니다. 그 또한 겸손하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의 신앙은 과학계에서도 잘 알려졌습니다.
패러데이는 모든 자연의 특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되었기에 자연세계는 아주 근본적인 수준부터 서로 연관되어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전기와 자기 또한 실제로 단일한 과정의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통하여 패러데이는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아이디어는 수학적으로 증명되진 못했기에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부정되었습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ames Clerk Maxwell, A.D 1831~1879)
현대 물리학의 창설자로 알려진 맥스웰은 고전 역학의 뉴턴과 견줄 정도로 전자기학 분야에서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패러데이와 잠시 함께 일했으며, 그의 업적과 신앙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패러데이의 가치관과 믿음을 공유한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맥스웰은 패러데이가 발견한 전자기 유도 현상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냈고, 4가지의 맥스웰 방정식을 정리하였습니다. (맥스웰 방정식 중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이 있습니다.) 이 맥스웰 방정식은 전자기학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프레스콧 줄 (James Prescott Joule, A.D 1818~1889)
줄은 라부아지에의 연구 결과를 기초로 하여, 물질과 마찬가지로 에너지도 형태만 바뀔 뿐 새롭게 만들거나 파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현재 “열역학 제1법칙”으로 알려져 있고 이는 에너지를 연구하는 기본 원리입니다. 줄은 모든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에 순종한 뒤 우리가 그 다음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는,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걸작에 증거로 제시된 지혜, 능력, 선함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 제임스 프레스콧 줄
현대 과학 (A.D 1900년 ~ 현재)
19세기 말, 자연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뉴턴과 뉴턴의 연구 성과를 기초로 연구한 사람들의 업적으로 인해 과학자들은 행성의 궤도를 그릴 수 있었고 그들은 우주에 관하여 많은 사실을 깨닫고 되었습니다. 또한 생명체를 연구한 자들도 미시 세계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었고 멘델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복잡한 번식 과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기도 서서히 정복되었고 전기와 자기의 관련성도 충분히 이해되고 고전역학으로부터 시작된 운동 법칙도 연구 가능한 모든 영역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발전들로 인해 발견할 만한 새로운 것들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발견들을 통해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막스 플랑크 (Max Planck, A.D 1858~1947)
플랑크는 뉴턴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한 가지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에너지는 양자라 불리는 아주 미세한 단위로 존재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물질이 미세한 원자 단위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에너지는 미세한 양자단위로 존재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개념은 혁명적이었습니다.
플랑크가 주장한 이 개념은 에너지와 물질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이러한 관점을 통해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이 생겼습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A.D 1879~1955)
광전 효과라 불린 문제는 뉴턴의 운동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으나 플랑크의 에너지 양자로는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플랑크가 주장한 내용들은 뒷받침하는 증거를 많이 확보했지만,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에너지 광자” 개념을 통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과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빛, 물질, 중력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발전시켰고 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은 실제로 물질이 어떤 방식으로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특수 상대성 이론을 통해 $\text{E} = \text{mc}^2$이라 하는 유명한 방정식을 유도해냈습니다. 또한 중력이 어떻게 작용되는지를 설명하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현대 물리학을 이끌어 가는 원리로 자리 잡았고 이 개념을 통하여 많은 분야에서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닐스 보어 (Niels Bohr, A.D 1885~1962)
보어는 “보어 모델”이라 불리는 원자에 관한 그림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그림은 고체를 다루는 수학에 기초하였는데, 여기에는 “에너지가 조그만한 단위로 존재한다는 가정”이 필요했습니다. 보어 모델을 활용했을 때 원자에 대한 수많은 신비들이 드러나게 되었고, 양자역학은 본격적으로 과학의 새로운 원리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양자역학은 뉴턴의 법칙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뉴턴 법칙은 양자역학의 근사치이기에 연구하는 대상이 거대할 때는 유효하지만, 그러나 대상의 크기가 작아질 때는 양자역학 법칙과 뉴턴 법칙 사이에 미세한 차이가 생깁니다. 양자역학의 법칙이 이때는 더욱 정확합니다.
스티븐 윌리엄 호킹 (Stephen William Hawking ,A.D 1942~2018)
스티븐 호킹은 우주론과 양자 중력에 관하여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블랙홀 이론에 관하여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21살 때부터 근육이 약해지고 마비되는 루게릭병을 앓았고 최대 2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병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55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는 루게릭병으로 몸이 점점 마비되어 책을 넘기기 힘들고 한 줄의 수학 공식도 쓰기 힘든 상황 가운데 그는 암산으로 수학을 계산하고 혼신의 노력으로 박사학위를 따냈습니다.
과학사를 통한 결론
이렇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과학사를 알아보며 가져야 할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사는 내용이 워낙 방대하기에 이 포스팅도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간략한 과학사를 통하여서도 배울 점은 많습니다. 이를 통하여 본격적인 과학을 공부하기 전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을 요약하자면 이와 같습니다.
🔥 “좋지 않은 개념을 고집하느라 훌륭한 개념을 거부한 사례들은 많이 발견할 수 있다.”
🔥 “어떤 개념이 기존에 갖고 있는 고정 관념에 딱 들어맞는다는 이유로 그 개념을 꽉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되고, 과학은 개인적, 공동체적 신념 체계가 아니라 적절한 자료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
🔥 “과학자들도 실수를 하기에 과학자들의 권위에 기대는 것을 중단하고 실험과 자료에 의해 연구 성과가 비판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 “기독교 세계관은 시행착오 방식에 기초한 단순한 관찰에서 진정한 과학으로 전환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에 순종한 뒤 우리가 그 다음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는,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걸작에 증거로 제시된 지혜, 능력, 선함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 교훈들을 마음에 새기며 앞으로의 과학 공부를 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